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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보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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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봉안 이후에도 여러 위기에 봉착하면서도 슬기롭게 극복하여 현재까지 거의 온전하게 보존 팔만대장경판은 1360년(공민왕 9) 윤5월 이전 지속적인 보존과 관리를 위해 국가적 변란 등에 비교적 안전하며 경판 판각 등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던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 봉안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과 유구국 및 쓰시마가 고려 말부터 사신을 보내 팔만대장경을 요구하기 시작하다가 조선 초기에 이르러 각종 토산물을 바치면서 더욱 끈질기게 요구해왔다. 특히 세종 때에는 대장경판의 자체를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12월, 6년 정월.2월.12월, 7년 4월.5월 등의 기록에는 일본 사신이 단식까지 하면서 완강하게 팔만대장경판을 요구하자 세종은 대장경판이 우리나라에 오직 한 벌 밖에 없으므로 줄 수 없다고 말하며, 팔만대장경판을 대신하여 범자(梵字)의 밀교대장경판(密敎大藏經板), 주화엄경판(註華嚴經板) 대장경(大藏經) 1질, 금자(金字) 화엄경(華嚴經), 호국인왕경(護國仁王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석가보(釋迦譜) 등을 주어 가져가게 하였다. 특히 1424년 정월에는 왜통사(倭通事) 윤인보(尹仁甫)와 그의 아우 윤인시(尹仁始), 그의 집에 있는 왜노(倭奴) 3명이 대장경판을 약탈하려는 사건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일본의 지나친 팔만대장경판의 요구에 대응하여 세종은 1437년 4월 해인사의 대장경판을 도성 근처로 옮기는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다(『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4월 정해). 이후 1440년 9월에는 팔만대장경판을 흥천사(興天寺)로 옮기려는 과정에서 좌정언(左正言) 박적선(朴積善)의 건의를 수용하여 중단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권90, 세종 22년 9월 신해). 이처럼 조선전기에는 일본 등지의 지나친 요청에 따라 팔만대장경의 안정적인 보관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팔만대장경판과 대장판전을 포함한 해인사의 건물들은 임진왜란의 전쟁과정에서도 피해를 면하였다. 이를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임진년 왜란 때에 금강산.지리산.속리산.덕유산은 모두 왜적의 전화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소백산, 그리고 가야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예부터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해인사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지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당시 이 지역을 지켰던 승병(僧兵)과 의병(義兵)의 힘이 절대적으로 컸기 때문이다. 이들의 항전에 힘입어 팔만대장경은 전쟁의 피해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보름 만에 경상도 전역의 주요 읍성들을 모두 짓밟았다. 그 과정에서, 왜군은 창원.창녕.거창 지역을 지나 4월 27일에는 해인사의 코앞인 성주지역을 점령하였다. 이 때 왜군은 북상하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약탈할 개연성이 높았을 것이다. 여말선초 이래 그들의 팔만대장경에 관한 집요한 요구가 이를 반증한다. 이 당시 해인사를 왜군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것은 소암(昭岩 : ?~1605)대사가 이끈 해인사 승병과 거창.합천 일대에서 송암(松庵) 김면(金沔 : 1541~1593),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 : 1535~1623)이 각각 이끈 의병이다. 이들은 가야산으로 접근하려는 왜군의 진격로를 막아 왜군이 이듬해 정월 개령.선산 쪽으로 철수하게 하면서 해인사와 팔만대장경도 안전할 수 있었다. 소암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아 왜군과 싸운 휴정(休靜) 서산(西山 : 1520~1604)대사의 제자로 종전 이후 해인사의 백련암을 1605년에 창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고, 김면과 정인홍은 모두 남명(南冥) 조식(曹植 : 1501~1572)의 제자다. 조선 후기 해인사의 수차례 화재 발생에도 안전 조선후기 해인사에서 발생한 화재 현황은 1876년 2월 퇴암(退庵)스님이 찬술한 『해인사실화적(海印寺失火蹟)』에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화재는 1695년(숙종 21, 을해)에 일어나 동쪽의 여러 요사와 만월당과 원음루가 불탔다. 두 번째 화재는 그 이듬해(병자년) 봄에 서쪽의 여러 요사와 무설당이 불타버려 뇌음(雷音)스님이 중창하였다. 세 번째 화재는 1743년(영조 19, 계해)에 대적광전 큰 축대 아래의 당우 수백 칸이 불타버려 경상관찰사 김상성(金尙星 : 1703~1755)의 도움으로 능운(凌雲)스님이 중건하였다. 네 번째 화재는 1763년(영조 39, 계미)에도 불이 나자 설파(雪坡 : 1707~1791)스님이 그때 경상관찰사로 있던 김상철(金尙喆 : 1712~1791)의 협조로 사원을 중건하였다. 영조 때 능운스님과 설파스님의 중건은 1769년 6월 유기(有璣 : 1707~1785)가 지은 『해인사사적비(海印寺史蹟碑)』에 "성상(영조) 19년 계해년(1743) 큰 축대 아래 수백 칸이 모두 불탔다. 그 때의 관찰사 김상성이 돈을 희사하고, 계획을 세워 복구하였고, 그 뒤 20년을 지나 계미년(1763)에 또 불탔으므로 공의 당제(堂弟) 김상철(金尙喆) 또한 관찰사가 되었다가 돈을 내고 설계하기를, 그 전보다 배를 더하여 초막 하나 짓는 것보다 더 쉽게 복구하였다."고 하였다. 다섯 번째 화재는 1780년(정조 4, 경자년) 정월에 일어났다. 무설당에서 불이 나서 건물 일부를 태웠는데, 5년만인 1784년에 성파(星坡)스님이 다시 중건하였다. 여섯 번째 화재는 1817년(순조 17, 정축년) 2월에 이르러서는 아주 큰 불이 나서 수백 칸의 당우가 타버렸다. 그 때 제월(薺月)스님이 화주가 되어 영월(影月).연월(淵月)스님과 함께 경상관찰사 김노경(金魯敬 : 1766~1840)의 도움으로 절을 중창하였는데, 지금 해인사의 법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은 그 때 다시 지은 것이다. 김노경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 1786~1856)의 아버지며, 대적광전은 1818년 중건하였다. 1971년 7월 18일 대적광전 중수 때 발견된 상량문은 김정희가 33세이던 순조 18년에 금가루로 쓴 친필로서 만년에 보이는 호방 장쾌하고 변화무쌍한 필법과 달리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30대 추사 글씨의 전형을 보이는 것으로 평가한다. 일곱 번째 화재는 1871년(고종 8, 신미년)에 법성료(法性寮)에서 불이나 전소되었다. 『해인사실화적』에는 1817년 일어난 화재이후 비록 중건하였으나 "전날의 규모가 그대로 복구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1871년 소실된 법성료는 "아직 다시 짓지 못하고 있으니, 인연 있는 이를 기다리는 셈인가? 애달프다!"고 하였다. 그리고 "1695년(강희)로부터 1871년(동치)까지 몇 백 년이 못 되어 일곱 번이나 화재가 있었으나, 장경판전만은 그대로 보존되었으니 '이것이 사실은 변천하지만 이치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 할까"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임진왜란 이후 해인사에는 무려 일곱 차례의 큰 불이 났으나,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장경판전 건물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 한국전쟁의 위기 극복 팔만대장경판은 해인사와 함께 1950년 발생한 한국전쟁 때 잿더미로 변할 위기를 맞았으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낙동강까지 내려온 인민군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로가 차단되었는데, 이때 낙오된 인민군 약 900명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가야산에 숨자 이들 빨치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미군 사령부는 1951년 9월 18일 해인사에 공중 폭격을 단행하는 작전을 편다. 하지만, 당시 편대장 김영환(金英煥 : 1921~1954) 대령은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알고 폭격 명령 지점인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 상공에서 기수를 돌려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게 폭격 중지를 명령 내렸다. 김영환 대령은 편대장의 지시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 것,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해인사 밖 능선에 숨은 인민군 진지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 날 저녁 명령 불복종의 경위를 추궁하는 자리에서 김영환 대령은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라 생각한 점과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고 있으면서 차라리 인도를 잃을지언정 셱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한 점 등을 들며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없었다고 답한다. 김영환 대령은 공군 창설의 산파역이자 전투조종사들의 상징인 빨간마후라를 최초로 착용한 주인공인데 경기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간사이(關西)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광복 이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해 1946년 정월 15일 참위(지금의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1954년 3월 5일 F-51 전투기를 조종하여 사천에서 강릉기지로 향하던 중 악천후로 인해 34세를 일기로 순직했다. 해인사 스님들의 구전에 의하면, 6.25한국전쟁 당시 해인사를 점령하고 있던 인민군들이 철수하면서 불을 질러 태워버리고 갈 것인지 아니면 그냥 철수할 것인지를 놓고 자기들끼리 의견이 분분하여 투표로 결정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개표결과 한 표 차이로 장경판전을 비롯한 해인사 여러 전각들이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 1904~1979)은 당시 해인사 주지로 있으면서 인민군이 해인사를 점거하여 공군이 해인사를 피격하려 할 때 인민군 대장을 설득하여 딴 곳으로 피신하게 하고 해인사 마당에 대형 태극기를 깔아서 공군이 인민군이 떠나고 태극기가 있는 것을 비행기에서 식별 가능하게 하여 공습으로부터 보호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장경판전은 목조 건물이기 때문에 화재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화재에도 안전하고 전쟁 시 폭격에도 끄떡하지 않는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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